여행작가 정윤배
기상 관계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추위가 늦게 찾아온 북반구에서 때아니게 폭우가 내리는가 하면 이례적으로 11월 적도에서 동시다발로 발생한 태풍으로 인한 기상이변을 겪고는 있지만 가을은 어느덧 우리들 발밑에 내려앉았다. 일조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사람에 따라서는 우울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볼 시간적 여유 없이 무방비로 일조량 결핍으로 오는 신체의 이상 신호를 굳건하게 견디어 나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에게 감기와 같은 우울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일탈을 꿈꾸게 한다.
의사는 증상에 따라 고용량의 비타민D와 C, 때에 따라서 호르몬제를 처방하기도 한다. 누군가 어떤 사람은 여행에서 활력을 찾기도 한다. 그래서 가을에 떠나는 여행은 오로지 자신을 위한 여행이어야 한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적인 상황이다. 어디서 자고, 누구와 함께 할지, 멋진 여행지를 찾아 인생 샷을 남길지 고민하다 보면 이 또한 스트레스로 작용하기도 한다. 여행의 고수들은 이럴 때 계획하지 않고 길을 떠난다. 얼핏 무계획으로 떠나는 여행이 쉬울 것 같지만 진정한 여행의 고수만이 할 수 있는 것이 No Maps, No Plan, No Rule, Just Ride. 어쩌면 여행을 안내해야 하는 모든 여행안내서는 나에게 맞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는 멋진 가을을 볼 거야, 그 속에서 나를 찾아야 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신을 들여 보고 자아를 찾는 진정한 가을여행이 된다.
내비게이션의 길 안내를 믿고 따르다 보면 목적지에 수월하게 도착하지만 풍경이 말을 거는 것을 귀담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도로에는 수많은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고, 때로는 목적지를 벗어난 곳에서 오롯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나를 만나기도 한다. 가을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대한민국 어디나 아름다운 광경을 만날 수 있다. 앞에 가는 차량의 브레이크 등만 보고 달려야 하는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를 벗어나 방송에도, 인터넷에도 보지 못한 우연한 가을 속 풍경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 그래서 가을 속으로 길을 떠나야 하는 필연성, 울긋불긋 단풍 든 낙엽이 발길에 차이는 11월에 해야 할 여행이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방향은 정해야 길을 나설 수 있는 법, 도심을 벗어나 시골길을 달리다 한적한 곳에서 11월의 가을을 보고 발 길 닫는 곳에 바다가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생각이 든 순간 강원의 산과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6번 국도를 달리다 여주를 지나 삿갓재 향하는 옛 42번 국도였던 간매리를 지난다. 간매리를 지나 삿갓재를 넘으면 이제까지 평야지대였던 길과 달리 강원도로 접어들면 길은 굽고, 산은 험해진다. 여주와 문막을 잇던 이 길은 42번 국도로 국도개설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험하기로 유명해 인적도 없던 길이었다. 이따금 한적한 길을 찾아 나선 여행객들이 오고 가던 그런 험한 길이다. 42번 국도라는 명칭을 자동차 전용도로에게 넘겨주고 삿갓재를 오가는 길은 인근의 골프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 되고 말았다. 그 길이 주는 고즈넉함과 좌우로 깊은 커브 구간을 운전하는 드라이버에게 재미를 준다. 삿갓재 너머 오래전 부평리 이장님이 전빵을 하던 길에서 세종천문대라는 이정표를 보고 가보지 않은 곳이 있어 길을 따라 들어섰다. 가마소유원지라고 지도에 표기된 곳에서 고즈넉한 장소를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소슬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차 위로 떨어지는 모습이 ‘볕뉘.’라는 우리말, 흔들리는 잎새 사이로 햇볕이 일렁이는 모습과 묘하게 일치하며 갈잎이 가슴에 내려앉는다.
문막에는 수령 800년의 반계리 은행나무가 깊은 가을이 왔음을 보여준다. 아파트 11층 높이의 반계리 은행나무는 여타의 은행나무에 비해 드넓은 개활지에 자리하고 있어 그 위용이 대단하다. 은행이 단풍으로 온통 노랗게 물이 들면 전국에서 그 장관을 보기 위해 찾는 발길로 들고나는 길이 장사진을 이룬다. 평야지대의 조용한 농촌마을이 북새통을 이루는 유일한 시기이기도 하다. 영동의 천태산 은행나무, 양평 용문사 1,100년 수령의 은행나무, 안동의 용계리 은행나무와 비교해도 그중 가장 거대한 위용을 보여주는 은행나무. 시기를 맞추어 부는 바람에 은행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본다면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 될 것이다.
드넓은 개활지의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에서 단풍이 떨어지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정선의 늦가을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42번 국도는 평창과 정선을 지나 동해까지 이어진다. 치악산을 좌측에 두고 평창을 지나 정선에 들어섰다. 정선의 가을은 깊다. 정선의 가을은 빛의 속도로 앞을 스쳐 지나간다. 어느 곳을 지날 때는 들깨 터는 내음이, 어느 곳을 지날 때면 낙엽 타는 내음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비강을 통해 대뇌에 전달된다. 그럴 때 아스라이 어린 시절 잊고 있던 향수에 빠져들며 가슴 한쪽이 뻐근해 온다.
정선군청 소재지를 지나 여량을 향하다 자개골 입구 이끼터널 위를 지나는 정선선 철로가 보고 싶었다. 한때는 탄을 실어 나르던 산업의 대동맥 역할을 했던 정선선. 지금은 구절리와 여량을 오가는 관광열차와 레일바이크를 찾는 사람들로 인기 만점이다. 평창 진부를 잇는 지름길이기도 한 자개골 입구는 20년 전 그 모습 그대로이다. 구절리역도 역사 주변만 곱게 단장했을 뿐, 구절리 마을도, 아우라지 마을의 모습도 변치 않은 그 모습 그대로 찾을 때마다 마음을 푸근하게 감싸주는 힘이 있다.
구절리와 배나들이, 강릉을 오가기 위해 왕산면 대기리까지의 415번 지방도는 한적하다 못해 마주 오는 차량이라도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다. 이 길을 오간지 30여 년, 정선선 철로 위를 거닐어 본 것은 구절리역사가 폐역이 되어 하루하루 철길이 녹슬어 갈 때 일이다. 자개골 입구에 바이크를 세우고 낙엽송 숲길 사이 정선선 철로 위에 서 있었다. 낙엽송 잎은 바람에 차분히 내려앉고 예의 그 ‘볕뉘.’를 보면서 혼자만의 시간 외롭지 말라는 듯 구절리와 여량을 오가는 관광열차가 내 앞을 지나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열차가 지나가고 적막한 낙엽송 숲 사이로 난 철로를 한참이나 보다 바다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왕산면 대기리 꼭대기 마을 산촌체험학교에는 4계절 지키고 있는 눈사람이 나를 반긴다.
해불양수, 바다는 모든 물을 가라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사자성어를 생각하며 주문진의 바다에 한참 서 있다. 6번 국도를 타고 귀향하던 길, 44번 국도를 타다 인제대교를 건너 인제군 관대리 소양호반에 내려앉은 가을을 바라본다.
[여행작가 정윤배 / ochetuz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