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 정윤배
단풍철이 되면 각종 방송매체나 모임에서 거의 매해 같은 질문을 받는 것 중 하나. 이제까지 본 단풍 중 어디 단풍이 제일이었냐는 것이다. 평창과 정선을 오가는 계곡 옆으로 난 국도변의 화려함도, 늦가을 경북 산지의 낙동강 주변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며칠 전 서울에서 제일 빠른 단풍을 볼 수 있는 곳, 숨은벽 능선을 산행하며 지인에게 받은 질문이기도 하다.
대답은 그해 단풍이 제일 곱다고 말은 했지만 유난히 기억에 남는 단풍이 있기 마련이다. 단풍하면 내장산 단풍을 손꼽지 않을 수 없다. 단풍 절정이라는 산의 80% 정도 단풍이 들었던 때 내장사 입구에서 내장사까지 이르는 길은 그야말로 그늘까지 붉게 물들어 있을 정도이다. 그 유명세에 치여 내장산 단풍을 찾지 않다 그래도 내장산 하면 단풍이라는데 어찌 찾지 않을 수 있으랴 싶어 비 내리는 이른 아침 내장사를 찾을 때가 있었다. 비 탓인지, 이른 아침인 탓인지 입구에서부터 내장사 일주문까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추적추적 계절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려 기운은 스산했지만, 촉촉이 젖은 단풍잎은 오히려 더 붉디붉다. 내장사 일주문을 지날 때쯤은 물에 젖은 단풍잎이 뒤척일 정도로 광풍이 불더니, 비는 이내 그치고 쪽빛 하늘 그대로였다. 하산 길의 단풍철의 내장사는 프로야구 경기가 끝난 잠실운동장 지하철역을 연상하게 했다. 사람에 갇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흐르는 데로 흘러가야 한다. 유명 관광지 '거기 언제 가면 딱 좋을까'를 피해서 다니는데 제대로 딱 걸렸다. 산 입구에는 음식점의 기름냄새. 사람에 치여 망치는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가 내장산 내장사 입구.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지만, 일생에 단 한 번은 단풍 절정에 찾아야 할 곳이 내장산 내장사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꼽는다면 설악산 가야동의 단풍이다. 어느 해 모처럼 취재도 아니고, 단체 여행도 아니고 가을이 깊어가는 날 혼자 설악을 찾았다. 우연히 수렴동 산장에서는 엄홍길 대장 일행과 산장지기 김경수 형님과 저녁을 함께 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뜨끈한 아랫목에서 푹 자고 일어 날수 있었다. 아마도 엄홍길 대장은 잠자리가 낯설어서 인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며 산행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역시 세상에 쉬운 산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수렴동에서 가야동 계곡은 산행 금지되기 전 찾았던 곳, 홀연히 가야동 계곡으로 스며들었다.
설악산의 수많은 계곡 중 가장 순한 계곡, 암반과 단풍, 계류가 부드러운 곳. 오래 전 기억을 더듬어 계곡의 물을 이리 건너고 저리 건널 때마다 만나는 설악의 속살과 붉디붉은 단풍. 오로지 가야동 계곡이 내 것인 양... 오래전 옷을 다 벗어 배낭에 넣고 등산화만 신고 오가던 이십여 년 전이 생각났다. 반나절 동안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했던 수렴동 산장에서 희운각까지의 가야동 계곡. 피부에 온전히 와닿는 설악의 가을. 바지를 입었을 때는 느끼지 못하는 고환의 좌우 흔들림. 알탕 할 때 신체에 입맞춤하는 물고기가 전해주는 부드러운 짜릿함. 그렇게 꼽는 단풍이 설악산 가야동 단풍이다.
이년 전 이십 년 악우와 암벽산행에는 전혀 경험 없는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숨은벽을 찾았다. 고교시절 산악부였던 친구가 데려온 동창이라 암벽에 대한 기본 교육은 되어 있는 줄 알았더니, 등산화도 트레킹화, 슬랩에서 기본인 11자 발의 자세도 안 되어 있는 그야말로 생초보를 데려 온 것이다.
필자와 같이 자일을 묶은지 20년 된 악우들은 여성 산악인, 아마도 여자가 가는데 남자가 못 갈까 싶어 숨은벽 대슬랩에 붙었나 보다. 웬걸, 중간에서 슬립으로 겁을 먹고, 만화에서나 볼 법한 미끄러지는 발을 다다다다~ 잰발로 미끄러지면서 올라가는 모습을 처음 봤다.
언제나 후미를 보고 있던 터라 대슬랩을 마치고 올라와보니 친구의 얼굴은 백지장이 되었고, 사람의 눈이 어떻게 저럴까 싶을 정도로 분기탱천해 있다. 언제인가 봤던 염소의 눈 바로 그것이다. 슬립을 먹으며 자일을 잡은 탓에 자일을 쥐고 있던 손가락 전부가 바위와 마찰하면서 벗겨졌다. 뼈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그래도 어찌하랴 일행을 믿고 정상까지 가야 한다. 속으로 얕봤을지 모르는 여자 일행들의 응원에 힘입어 숨은벽 등반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만, 그 이후 이 친구는 암벽 근처는 얼씬도 안 하게 됐다. 절대 해서는 안되는 금기가 암벽 기본교육을 받지 않은 초심자를 동행하는 등반행위.
이후 등반은 순조롭고 부드러웠다. 숨은벽 크럭스라는 고래등바위에서도 누구 하나 겁을 먹어 지체하는 법 없이 잘 짜여진 자일 파티처럼 고도를 높여갔다. 그러다 발아래 펼쳐진 백운대 북사면 바람골의 단풍은 이제까지 올려 보던 단풍과 또 다른 절경을 빚어 놓았다.
일행이 있어 오버하지 않으려고 감정을 추스렀지만, 마치 내설악 만경대에 올라가 처음으로 내설악의 전경을 봤을 때처럼 음속 주파음의 소리와 충격이 가슴을 치고 나가는 것 같았다. 안자일렌으로 연등을 하지 않았다면 "헉"하는 단발마를 내지는 않았지만 눈물 한 방울 찔끔 흘렸을 것이다. 노출 브라케팅을 할 만큼 시간이 없어 딱 3컷 찍고 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는 것이다. 일주일 후 인수릿지와 숨은벽 사이 계곡을 찾았다 또 한번 놀랐다. 그늘까지 붉은 단풍의 장관. 내가 꼽는 최고의 단풍이다.